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호의 난 (문단 편집) === 관리들의 수탈 === ||익어 거꾸러진 보리이삭 내버려두고 무성하게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두고 청자와 흰쌀 가득 싣고 북풍 타고 올 배만 기다리노라.[* 고려의 문신 [[이제현]]의 소악부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는 당시 제주 백성들이 부른 노래. 이제현은 그 무렵의 제주의 모습에 대해서 "'''지금 관가와 민간의 우마가 들에 가득하지마는 밭 가는 곳은 없고 관인의 행차가 베틀북마냥 뻔질나게 오가느라 전송과 영접에 고달프니 탐라민의 불행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변이 생겼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제주로 파견되는 고려의 관리들은 대부분 탐라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악명이 높았다. 도민들이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 사람을 다시 보내주면 반란을 무르겠다고 했을 정도.[* 최척경은 반란군이 최척경을 다시 보내주면 우리가 반란을 물리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고, 이백겸이나 송영 역시 [[충숙왕]] 5년(1318년) 2월 반란군이 올린 “이백겸이나 송영이 다시 와서 달래준다면 우리가 어찌 반란을 일으키겠는가?”라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송영이 제주목사로 다시 부임했다. 이들의 반란은 송영이 도착하기 직전에 토인(즉 제주인) 문공제에 의해 진압되었다.] 고종 때의 제주판관 김구는 제주의 논밭마다 돌담을 쌓게 해서 사람들의 땅의 경계를 분정해주었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제주부사 김지석은 그때까지 바치던 세금을 줄여 없애게 했고 그 후임으로 온 경세봉까지는 그래도, 고려에서 온 관리로서 괜찮은 대접을 받고 좋은 평가도 많았지만 탐라가 몽골에 예속되고부터는 지방관이랍시고 부임한 인간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돈에 눈이 멀어서...[* 물론 고종 31년(1244년) 2월에 전임 제주부사 노효정과 판관 이각이 임기 중에 파선된 [[일본]] 상선에서 고가품을 훔친 죄를 들켜서 유배되기도 한 경우도 있기는 해서 단순히 원 간섭기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겠지만.] [[충숙왕]] 10년(1323년)에는 제주만호로 가 있던 [[임숙]]이라는 자의 이름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임숙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지를 이탈해 있었다고 했는데 며칠 동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조정에서 보낸 관리였던 임숙은 제주에서 가혹한 수탈로 악명이 높았는데(해먹은 것만 1만 단이 넘었다고), 좌우사낭 중 오적에게 뇌물을 바치고 풀려나 다시 제주에 부임하게 되자 빡친 제주 사람들이 단체로 개경까지 상경해 저자에 투서를 붙였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임숙을 다시 부임시키냐? 성부(정동행중서성 즉 육지부 고려 조정)에서 가만있겠다면 원의 상성(상서성)까지라도 가서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렇게 된 이상 원나라로 간다]]~~ 고려 조정은 결국 임숙을 파직하고 박순인을 대신 제주 만호로 보냈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도]]의 여론은 [[고려]] 관리들의 잦은 수탈을 겪으며 고려 관리들에게 반감이 컸고, 목호 세력에 기울기 쉬웠지만[* 고려사 임박열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 [[도긴개긴|목호나 원나라 세력들이라고]] [[그놈이 그놈|제주도민들에게 딱히 우호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속담 가운데 ''''호첩(胡妾) 앞인가 기어다니게''''라는 말이 있는데, 매사에 굽실거리고 줏대 없이 설설 기기만 하는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로 여기서 호첩의 호는 몽골인 목호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 목호들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암시한다. [[원나라]]의 제주 경영은 초창기부터 '물자 수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제주도]]에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드넓은 목초지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원래는 섬 전체가 숲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원나라]]의 식민지가 된 이후로 [[말(동물)|말]]을 키울 목초지를 마련하기 위해 숲들을 대거 벌목한 것이다.], 그것의 강화는 곧 노동력 수탈의 심화를 의미했다. 《[[원사(역사책)|원사]](元史)》 권178 왕약열전에는 충렬왕 29년([[1303년]])에 원에서 고려로 파견된 왕약이 고려에 설치된 수역(水驛) 13곳과 통하지 않는 것을 파하고 '''탐라(제주)의 공물 가운데 토산품이 아닌 것은 면제'''해주니 동쪽 지역의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그때까지[* 제주도의 삼별초 잔당이 진압된 것은 1273년의 일이다. 원사의 해당 기록과 대조하면 거의 40년이나 된다.] '''제주에서 나지 않던 것까지 공물로 부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p.295] 그리고 이러한 물자 수탈은 지역 사정을 알고 노동력 동원 능력과 경험을 갖춘 자, 즉 제주를 오래 전부터 지배해온 성주, 왕자 등 탐라 속관층이 그 실무를 맡았는데, 총괄 지시는 몽골의 다루가치가 하면서도 실무는 속관인 성주, 왕자들이 이행하는 와중에 제주 내부 사회의 갈등은 나날이 깊어졌고, 여기에 고려에서 보낸 관리인 대호군 장공윤과 제주부사 장윤화의 탐욕과 행패가 발단이 되어 충숙왕 5년([[1318년]]) 엽호(獵戶)[* 일정한 만큼의 사냥감을 할당받아서 그것을 공납하는 역할을 맡았던 관직으로 추정.] 금성과 사용, 엄복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반란군이 가장 먼저 제주에서 내쫓은 것이 탐라의 성주와 왕자였다.[*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p.304.] 이들 성주, 왕자는 탐라의 토착 세력으로써 원의 (물자 수탈적인) 징세 업무를 수행하면서 제주도민의 원성을 사기도 하는 한편으로 제주의 고려 환속을 바라거나 이를 대비하는 행동을 취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아이러니하게도 원에 요청해 제주를 고려에 귀속시킨 것도 이들의 노력이었다.) 여기에는 지방관이 세금을 빙자해 사리를 채우고, 왕위 유지를 위해서도 물자를 거두어 원나라 황실과 고위 관료에게 바쳐야 했던 고려 조정과, 이러한 갈등을 이용해 다루가치를 파견해 제주를 오래 오래 해먹으려 한 원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